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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ITY OF STARS⭐] - 메인 로드의 군계일학, 조지 킨클라제
    카테고리 없음 2021. 8. 18. 15:01

    [CITY OF STARS⭐]는 본 관리자가 과거에 시티에서 빛났던, 현재 시티에서 빛나고 있는, 혹은 미래에 시티에서 빛날 별과 같은 선수들에 대해 소개하고 싶어 고안한 시리즈 형식의 글입니다. 선수 소개글이라고 이해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본 게시물은 시리즈의 첫 번째 글입니다.

    1995-96 시즌, 블루스에서 첫번째 시즌을 소화 중인 킨클라제.

    선수 프로필


    이름 : 조지 킨클라제 (Georgi Kinkladze, გიორგი ქინქლაძე)

    생년월일 : 1973.6.6
    국적 : 조지아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선수 커리어 되돌아보기

    독일의 1. FC 자르브뤼켄 임대 시절 당시 킨클라제.

    조지 킨클라제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나라인,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소련이었죠.

    그는 2살 때부터 왼발로 공을 트래핑하는 등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줬고, 이러한 모습에 킨클라제의 가족들은 어릴 적부터 조지가 축구 선수로서 성공하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로비존 킨클라제는 아들의 균형 감각 향상에 도움이 될까 싶어 조지를 조지아 전통 무용 강좌에 데려가곤 했다죠.

    킨클라제가 처음 정식으로 축구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6살일 적, 트빌리시와 조지아의 최고 명문 팀인 디나모 트빌리시 유소년 팀에 입단하면서부터였습니다. 킨클라제와 그의 가족들은 부푼 꿈을 안고 구단으로 향했고, 이후 그는 약 10년간 디나모 트빌리시 유소년 팀 밑에서 축구를 배워나갔습니다.

    허나 적은 출전 시간이 그의 성장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팀에는 킨클라제 말고도 빼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킨클라제는 1989년 소련으로부터 독립된 조지아 축구리그가 설립됨과 동시에 창단한 같은 지역의 므레테비 트빌리시라는 팀으로 이적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나이 16살 때 일입니다. 므레테비는 그의 원 소속 팀보다 낮은 레벨에 있는 팀이었지만, 경험을 쌓기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므레테비 트빌리시에서 보낸 2년의 시간 동안 킨클라제는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친정팀 디나모 트빌리시로 복귀, 19살의 나이에는 성인 국가대표팀 데뷔전까지 치를 수 있었습니다.

    킨클라제는 더 이상 조지아 리그라는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고, 독일의 자르브뤼켄과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 임대 생활을 통해 경험을 쌓아나갔습니다. 1994년에는 A매치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조지아가 거둔 5:0 대승의 중심에 서며 수많은 영국 프로 축구 구단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중에는 맨시티 역시 포함되어 있었죠. 스페인 마드리드의 두 팀 역시 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당시 맨시티의 회장직을 지내고 있던 프랜시스 리의 의지가 더 확고했습니다. 이후 원 소속팀인 디나모 트빌리시와의 여러 차례 협상 결렬과 취업 비자 발급 문제 등으로 인해 영입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꿋꿋이 이적을 추진한 끝에 결국 1995년, 400만 유로의 금액에 킨클라제는 맨체스터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22살 때였습니다.


    메인 로드에 입성한 킨클라제

    팀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선수 시절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던 앨런 볼이 사령탑으로 부임하며 기대를 받았지만 실상은 개막 후 11경기에서 승점 2점, 3득점만을 기록했을 뿐이었습니다. 킨클라제 선수 본인의 영국 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는데, 그는 영어를 구사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으며 이와 같은 복합적인 문제들로 인해 향수병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킨클라제의 적응을 돕기 위하여 그의 친구들과 어머니가 나섰고, 그들은 직접 맨체스터로 향해 킨클라제의 향수병 극복을 도왔습니다. 킨클라제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조지아산 식재료를 공수해 와 요리해주기도 했다고 할 만큼 열심히 그를 뒷바라지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을까요. 킨클라제는 95년 11월 당시 리그 우승 경쟁 중이었던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 승점 3점을 가져오는 결승골로 시티에서 강렬한 데뷔골을 신고합니다.

    이후 킨클라제의 활약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앨런 볼은 킨클라제에게 프리롤을 맡겼고, 이는 킨클라제가 본인의 천재성을 더욱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덕분에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던 케빈 키건의 뉴캐슬과 3:3 무승부를 거둔 경기와 같이 그의 재능은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미들즈브러전과 사우스햄튼전에서 기록한 득점 역시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멋진 골들이었습니다. 특히 그중 소튼전 골은 프리미어리그 3월 이달의 골로 선정되었으며, BBC에서 선정한 '올해의 골' 2위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킨클라제의 소튼전 원더골 👈

    이 경기 직후 앨런 볼은

    "마라도나의 잉글랜드전 골에 가장 근접한 득점을 봤다. 마라도나가 손으로 넣은 골이 아니라 그가 상대 선수 전원을 제치고 마무리한 그 골 말이다. 몇몇 사람은 우리가 왜 킨클라제 같은 선수를 잉글랜드로 데려오느냐고 묻는다. 오늘 이 골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라며 킨클라제를 찬양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킨클라제,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시즌 종료 후 결국 시티가 2부 리그로 강등당하게 된 것입니다. 킨클라제가 놀라운 득점을 성공시켰던 미들즈브러(12위), 사우스햄튼(17위) 등 구단들에 밀려 간발의 차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시즌을 전체적으로 되돌아봤을 때 킨클라제가 그와 비슷한 플레이스타일을 지닌 선수들인 보로의 주니뉴와 소튼의 르티시에보다 뛰어났던 순간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시즌 초반의 부진이 부메랑처럼 그와 팀에게 되돌아왔습니다.

    앨런 볼 감독은 경질되었고, 팀 내 주요 선수들과 함께 킨클라제 역시 팀을 떠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주었던 메인 로드의 팬들을 한 시즌만에 등져버리지 않기로 결심했고, 등번호를 기존의 7번에서 10번으로 변경하며 맨체스터에서 새로운 시즌을 준비했습니다. 당연히 현지 팬들은 그에게 더욱 뜨거운 지지를 보냈습니다.

    95-96 시즌 최종전 리버풀전 2-2 무승부로 2부리그 강등이 확정되자 실의에 빠져있는 시티 선수단

    새로운 감독인 프랭크 클라크, 그리고 팀 내 최고의 에이스 킨클라제와 함께 시티는 한 시즌만에 1부 리그로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팬들의 예상은 모두 빗나갔습니다. 2부 리그에서의 첫 시즌을 앞두고 스트라이커 나이얼 퀸 등 주축 선수들이 대거 이탈해 팀의 전력이 대폭 하락해 있었던 것은 물론,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클라크 역시 특출난 면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킨클라제는 시티에서의 데뷔 시즌이었던 95-96 시즌에 이어 2년 연속으로 맨시티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지만, 그 혼자서 팀을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킨클라제는 시즌 종료 후 맨시티와 재계약을 체결하며 잔류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FC 바르셀로나 등 유럽 굴지의 빅클럽들의 관심을 뿌리치고 말이죠. 이에 로컬 팬들은 그가 95-96 시즌 종료 후 팀에 남기로 결정했을 때처럼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보답했지만, 새 감독인 조 로일에게만은 아니었습니다.

    97-98 시즌 도중에 새롭게 사령탑에 오른 조 로일이 감독으로서 참석한 첫 이사회에서 내뱉은 첫마디는 바로 '킨클라제를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전 앨런 볼, 프랭크 클라크보다 엄격한 성향의 지도자였으며 킨클라제가 경기 중에 상대 진영에서 산책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1998년. 끝없이 추락하던 팀을 져버리지 않으며 의리를 지켰던 킨클라제는 수뇌부의 결정에 의해 네덜란드 명문 아약스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시티는 정말로 끝없이 추락하여 98-99 시즌을 3부 리그에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아약스 시절 킨클라제

    킨클라제의 재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4-3-3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체계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얀 바우터스 감독의 아약스에는 킨클라제와 같은 No.10 선수를 기용할 자리가 없었고, 그는 아약스에서 단 한 시즌을 소화하고 네덜란드를 떠나게 됩니다. 이후 더비 카운티로 이적해 잉글랜드에 컴백하였다가, 2006년 러시아 루빈 카잔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합니다. 그의 나이 33살이었습니다.


    맨체스터 더비에서 활약 중인 킨클라제

    선수 총평


    조지 킨클라제의 시티 시절에 대해서는 항상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뒤따릅니다. 일례로, 맨시티의 골수팬으로 유명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킨클라제가 활약하던 당시 남긴 예언 아닌 예언이 있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킨클라제가 시티를 유러피안컵으로 이끌거나 4부 리그로 이끌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는 부정적인 쪽으로 거의 적중하여 킨클라제가 시티를 떠나던 1998년 맨시티는 3부 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를 한 차례 지도해 봤던 경험이 있는 프랭크 클라크 역시 훗날

    "우리는 킨클라제에게 팀을 맞추려고 나머지 선수들을 마치 매듭을 지어놓은 것처럼 서로 묶어버렸다."

    는 내용의 인터뷰를 남기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동시에 지나치게 킨클라제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에 대한 비판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맨체스터 시티 구단과 메인 로드의 팬들에게 남긴 것 역시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는 팀이 힘든 강등권 싸움을 펼치는 도중에도 이따금씩이면 영국 전역을 들썩이게 할 만한 놀라운 활약을 펼쳐 주목을 끌었습니다. 또한 더비 라이벌 팀인 맨유에 에릭 칸토나가 있다면 맨시티에게는 킨클라제가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오아시스의 '원더월' 멜로디를 본떠 만든 킨클라제의 응원가가 항상 경기장 주변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킨클라제라는 선수가 현지 팬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로 통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양날의 검과 같은 선수 조지 킨클라제. 맨체스터 시티는 그가 머무르던 시절에 겪었던 아픔은 모두 극복했지만, 그가 보여준 마법과 같은 활약만큼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킨클라제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이거나, 내가 본 최고의 것.

    -노엘 갤러거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참고 문헌

    Wikipedia
    Transfermarkt
    [#8 CITY DNA / 조지 킨클라제] by. Rob Pollard
    [더 믹서(The Mixer)] by. Michael Cox : [CHAPTER 4 '베르캄프와 졸라-미드필드와 수비 라인 사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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